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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푸스 제국 북방에서, 파시키처럼 다채로운 이력을 지닌 소년은 없을 것이다.
언제 남하할 지 모를 니룬의 이동을 막기 위해서 세워진 요새도시 레노우. 가벼운 주간 순찰에서도 가볍게 손가락 한 둘 잃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 살벌한 동네이다. 그러기에 허드렛일부터 온갖 잡무까지 민간인의 손길이 닿는 곳은 없다. 보이는 것은 새하얀 눈과 검은 돌, 들리는 것은 니룬의 울부짖음과 총성 뿐이다. 오로지 국군으로만 구성되어 운영되는 최전방 요새도시에서 도락이란 일체 찾아볼 수 없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루빨리 일 년이 흘러 교체일이 되기를 바라며, 화장실 벽에 수백 개의 빗금을 긋는다.
이 모든 상황과 조건에서
예외로 두는 존재가 있다. 올해로 아홉 살인 파시키는 레노우 주재 OCL
총지휘관의 시종이다. 고대 감옥으로 쓰였던 시설을 개보수해서 만든 국군본부는, 레노우에서 몇
안되는 안전지대이다. 본부에서 항시 머무르고 있는 파시키는 총지휘관으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는다.
마땅히 요새도시 구성원이라면 일 년에 수 차례 참가해야 할 시외정지계획에서 파시키는
항상 열외로 둔다. 총지휘관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 그것이 암묵적인 룰이
되었다.
레노우에 머무르는 동안 다들
파시키를 동생처럼, 아들처럼 여기고 아껴주었다. 그들의 친절에 파시키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몸놀림이 날쌘 군인들 중 몇몇은 시간이 날 때마다 파시키에게 무술을 단련시켜주었다.
드물게 학구파인 자들은 책이 없는 레노우에서 파시키가 글을 깨칠 수 있게
열과 성을 다해 도와주었다. (그 성과에 대해서는 '노력의 가치가 값지다'라는 말로
대신하겠다.) 유무형을 가리지 않는 배려를 겸손히 받아들인 파시키는 답례로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매 년 가을이면 수도에서 황정
감찰관이 요란하게 레노우를 찾아온다. 쓸데없이 거창한 행차는 니룬을 자극할 뿐이라고 수도
황실에 연락을 넣어도 돌아오는 답변은 형식적인 거절 뿐이다. 온갖 거드름을 피우며
OCL을 깔보는 그들의 기세를 꺾는 것이 파시키의 몇 안되는 재능이다. 대단한
것은 필요 없다. 손수 끓인 따스한 차와 다과가 담긴 쟁반을 들고
응접실에 들어가면 그걸로 족하다. 시치미 뚝 떼고 "총지휘관이 조금 늦으신답니다."라고 말한
뒤, 허리 숙여 공손히 인사하면 된다.
한 박자 정도의 침묵이 흐른 후.
응접실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는 황정 감찰관이 두툼한 뱃살을 흔들며 뒤뚱뒤뚱
도망가면, 파시키는 그 뒷모습을 보며 쓰게 웃는 것이었다. 털을 잘 정돈한
꼬리를 축 늘어뜨리면서. 카니스 디루스의 피가 섞인 소년의 머리에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서 '파멸의 미음(微音)을 가려내는 체'라고 불리우는, 늑대의 귀가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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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시는 손님은 조금 특별하다."
총지휘관으로부터 내려온 명령은 짤막했다. 파시키는 군말없이 간단한 짐을 챙겨서 숙소에서 나왔다. 레노우는 모처럼 손님맞이로 들뜬 분위기에 북적이고 있었다. 양 귀를 내려덮는 두툼한 모자를 쓴 군인들이 쉴 새 없이 짐을 나르고 청소를 한다. 폭설기를 눈 앞에 둔 늦가을은 니룬들도 얌전히 계곡 속에서 잠을 잔다고 한다. 가장 큰 위험요소가 줄어드니 경계 수위가 낮아진 대신, 성채 안에서도 손님맞이에 겨울맞이에, 할일이 잔뜩 많아진다.
하지만 그 속에서 파시키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다들 저마다의 일로 바쁜 부엌에 들어가 음식거리를 조금
챙긴 뒤, 소년은 북문으로 향했다. 두터운 나무에 쇠판을 엇댄 성문 양
옆엔 조각상이 서 있다. 만년설이 쌓여 있는 검은 산의 돌로 깎아
새긴 조각상들은 오랜 비바람에 얼굴이 문드러져 있다. 그 것을 잠시동안 바라보았다.
어깨부터 발목을 덮을 정도로 휘느러진 망토는 손을 대면 금새라도 움직일 듯
하다. 허리 앞에 단정히 모은 두 손에 쥐여진 지팡이는 북문의 들보
위로 솟아오를 만큼 높다.
레노우에 국군이
주둔하기 훨씬 전부터 이 조각상은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국군본부처럼 고대
문명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미려했던 음각의 무늬들은 이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도
이 조각상이 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안심이 된다. 파시키는 손을 내밀었다. 짐승의
털로 뒤덮인 손가죽 위로 차가운 돌의 감촉이 느껴진다. 총지휘관의 지시가 이미
내려져 있었는지, 성벽 위에서 파시키를 내려다보고 있던 병사가 오른손을 어깨 위로
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북문이 좌우로 갈라지듯 열렸다. 재촉에 떠밀리듯 파시키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해가 지기 전 까지는, 안락했던 레노우 성채에서 벗어나있어야 한다.
등 뒤로 육중한 문이 맞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소년은 검은
산을 노려보았다. 흙과 돌, 심지어 나무조차 숯의 빛깔로 말라 비틀어진 검은
산. 죽은 땅과 살아있는 땅을 구분하는 건 새하얀 빛깔의 묘비같은 말뚝
뿐이다. 그 허술한 경계가 인간에겐 절대적인 금계이다.
소년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성채와 검은 산 사이엔 드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만약 인간 혼자서 그 사이를 걷는다는 건 자살과 마찬가지다. 파시키의 몸 속에 흐르는 피는 카니스 디루스, 늑대와 흡사한 외모를 가진 이형(異形)의 종족의 것이다. 선사 이래로 기나긴 세월동안 이형을 지닌 종이 곧 힘이자 권력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이 갑옷을 걸치고 칼과 방패를 쥐면 백 명의 인간이 달려들어도 쓰러지지 않았다. 피부도 얇고 손톱 발톱도 빈약하기 그지 없는 인간은 나약함의 상징이었다. 초기종 인간들은 이종에게 한없이 고개를 숙였다. 저들 살아남는 것조차 힘겨운 나머지, 다른 종족들이 그들에게 동정심마저 어렴풋하게 품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마법과
환상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한 줌의 노을조차 남기지 않았다. 인간의 품
속에서 여태까지 무사히 자라왔던 것이 기적에 가까운 것을 파시키는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자연을 숫자와 논리로 재단하는 공화국이었다면 진작에 박제가 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제국은 과거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는 이종을 딱히 핍박하지 않았다. 부흥을 꿈꾸는
로푸스 제국의 황실부터가 대체마법의 발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국
지식발전의 중추이자 영적인 지도자인 대현자는 이종에 대하여 한없이 관대했다.
'인간은 자신과 비슷하되 다른 외모의 종족에게 무쓸모한
적개심을 지니고 있다.'
이 한 문장으로
간단히 상황을 정리한 대현자의 말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제국의 그
어느 곳보다 지도자의 언행을 면밀하게 주시하는 곳이 국군이다. 위에서부터 솔선수범으로 이종을
받아들여야 시민들도 안심하고 '무쓸모한 적개심'을 버린다. 국가에 대한 순도높은 충성심으로 무장한
제국 최전방 요새도시에서 이종의 아이를 키운다면, 그것은 참으로 보기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레노우에서 파시키는 그런
존재였다.

"어차피 원래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지붕이 있는 보금자리가
아니야."
성채로부터 점차 멀어지면서도 소년은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풀끝이 노랗게 색이 바랜 언덕을 느긋하게 오른다. 한 눈에
레노우가 내려다보이고 햇볕 잘 드는 곳에 앉은 파시키는 늦은 점심 식사를
하였다. 식사라고는 해도 말린 육포와 딱딱한 빵 두 덩어리가 전부다. 음식
냄새가 니룬의 식욕을 자극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소년이라면 니룬과 마주쳐도
큰 문제가 없지만 주의를 기울여서 나쁠 건 없다.
입 안에 텁텁한 빵부스러기를 물로 흘려보냈다. 수통 뚜겅을 잠근 파시키는 기다란 육포 조각을 질겅질겅 씹었다. 퇴화한 어금니보다 송곳니가 쓰기 편한 파시키에겐 육포를 먹는 일이 의외로 피곤한 노동이다. 자리에 눕은 파시키는 흘러가는 구름을 눈으로 좇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공의 격풍은 북에서 내려와 검은 산을 휘감고 돈다. 그 광경을 구경하노라면 그리 심심하지는 않다. 잠깐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낸 소년은 소란스러운 성채로 시선을 돌렸다. 인간의 귀엔 들릴 리가 만무하지만 파시키의 귀엔 희미하게 들려온다. 어느 높으신 분이 왔는지는 몰라도 융숭한 대접을 한참 받고 있나보다.
앞으로 수 개월, 레노우에 폭설기가
찾아온다. 먹는 것부터 자는 것까지 편한 것이 없는 고통의 시기다. 그
시기를 눈앞에 둔 군인들은 마지막으로 햇볕의 따스함을 만끽하는 심정이겠지. 다들 한
마음으로 시끌벅적한 파티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들로부터 항상 겉도는 파시키, 자신과는
다르다.
섭섭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딱히 군인들이 부럽다거나 함께 있고 싶은 건 아니다. 파시키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다른 누군가와 손을 맞잡고 힘을 모은다. 인간들에게는
인간만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억지로 자신이 그 속에 끼어들 필요는
없다. 단지 성인이 될 때 까지는 그들과 함께 있는 편이 유용하다고
판단해서 함께 있을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숲
속에서 혼자 살아라고 하면 기꺼이 살 자신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스스로 되뇌이곤 했다. 파시키의 귀는 듣지 못할 것도 듣고, 듣지
말아야 할 것도 듣는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며 계절이 바뀌는 동안
소년은 성벽 너머의 음색에 귀를 기울였다. 내일이야말로 이 성을 떠나자, 그렇게
결심하고 밤새 짐까지 싼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의
부드러운 음성이 파시키의 마음을 붙잡아 매는 것이었다.
'소년이여, 뮐의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빚어진 신의 창조물이여.'
그 음성은 배 깊숙히 울려퍼지는 그윽한 목소리였다. OCL 총지휘관이
부하들 앞에서 엄숙하게 연설하던 목소리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얼굴없는 말을 듣노라면 마치
따뜻한 무언가가 자신의 어깨를 천천히 껴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참고 견디어라. 참아라. 한 어른 분의 몫을 하기
전까지.'
인간으로만 구성된 군인 속에서 겪은
이유모를 섭섭함에 눈물을 흘렸던 파시키도, 그 목소리엔 눈물을 안으로 꿀꺽 삼키었다.
그리고 다음날 퉁퉁 부은 소년의 눈을 보며 누군가가 수군거려도 절대 그
목소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주재 의료관에게 설명했다가는 정신이상 판정을 받고
골방에 갇히기 딱 좋았다.
파시키는 자신이
힘들 때마다 자그맣게 들려오는 목소리에게 '천사님'이란 이름을 붙였다. 제국 안에서는 무슨
종교를 믿든지 간섭당하지 않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제국에서도 마지막 가장자리에 있는
레노우 또한 마찬가지다. 시외정지계획 도중에 니룬과 전투가 벌어지면 군인들의 입에서 온갖
신이란 신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인간들이 믿는 신은 언제나 말이 없다. 하지만
소년이 믿는 천사님은 가끔씩 파시키의 혼잣말에 대답해줄 때도 있었다. 천사님도 나보다
귀가 밝으면 밝지 어둡지는 않겠구나, 하고 파시키는 내심 놀라곤 했다.
"...천사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압니까?"
해가 어느새 파시키의 콧날까지 내려왔다.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이 허공에 길다란 그림자를 그렸다. 레노우 성채에 대한 관심을 끈
파시키는 중얼거렸다. 천사님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다지 답변을 기대한 건 아니었으나,
조금 실망했다. 요 근래에 성채에서 나온 적은 거의 없었다. 니룬을 마주칠
수 있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소년은 북쪽의 검은 산 쪽으로 왔다.
천사님의 목소리가 왠지 북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착각이었는
모양이다. 파시키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이었다.
"오늘이 저의 아홉 번째 생일입니다."
"어머. 생일 축하드려요."
답변은 의외의 곳에서 들려왔다.
낯선 목소리에 깜짝
놀란 파시키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본능적으로 왼손은 허리에 차고 있던 단도로
향했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는 순간, 파시키의 경계심은 봄철의 눈이 녹듯이
사라졌다.
"평화로운 사색에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그렇게까지나
놀라실 줄은 몰랐다고 말하면 좋겠지만, 사실 살짝 놀래키고픈 장난스런 마음이 들었어요."
앞머리칼이 코 끝에 닿을 정도로 챙
없는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여자였다. 뒤집어쓰는 식으로 입는, 상하의가 일체로
된 새하얀 법의에 황금빛으로 화려한 자수가 테두리 마감마다 둘러져 있었다. 연한
노란빛의 머리카락은 여자의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다. 파시키보다 키는 약간 커 보였다.
하지만 파시키가 조금 더 오르막 경사에 있었기에, 올려다보고 있는 쪽은 여자였다.
"누구십니까. 이번에 온 손님들의 일행입니까?"
그렇게 물으면서도 파시키는 이미 이 소녀가 어디에서
왔을지 짐작하고 있었다. 레노우엔 여자가 없다. 그리고 군복 이외의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도 없다. 필시 오늘 성채로 찾아온 손님 일행과 관련있을 것이었다.
소녀도 거짓말할 생각은 없는지 순순히 대답했다.
"아닌데요."
생각지도 못했던 소녀의 말에. 파시키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저기, 사실대로
말해주시길 바랍니다. 여기는 민간인 통제구역입니다. 국군 소속이거나 두 명 이상의 일행과
함께 온 것이 아니라면 곤란합니다. 저와 함께 성채로 돌아가셔야만 합니다."
"저는 군인이 아니예요. 혼자 왔구요. 그렇게 말하는 파시키 씨 당신도 군인이
아니고 혼자 왔잖아요?"
"그건..."
소녀의
질문에 파시키는 식은땀을 흘렸다. 저 쪽은 이미 자신을 알고 있었다. 행여라도
경솔한 답변으로 일이 꼬인다면, 자신은 레노우를 떠나게 될 수도 있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여태까지 파시키를 특별히 대해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폐를 끼칠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이 요새도시를 떠나게 되면, 천사님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 수 없게 된다.
"후훗. 당황스런 표정이 마음에 들어요. 파시키 어플리키."
곤란한 물음을 던진 소녀는 정작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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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글이 아니죠(...)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올 해 목표는 [중편 이상의 글을 적는 것]입니다. 사실 블로그에 소설을 '연재'한다는 방식은 그리 어울리지 않습니다. 수많은 독자들에게 글을 알리려는 목적으로는 가장 나쁜 선택일 것입니다. 제가 이 곳에서 글을 올리는 것은, 아마 누군가에게 저의 첫 글을 쑥스럽게 보여주는 동시에 저 스스로의 각오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